누가 불러 잠시 다녀온 것도 모두가 야유회를 간다고 하니 누군가 한 명은 당번으로 남아야 하니까 공으로 남 때리는 피구도 싫고 헛발질 잘하는 족구도 못해서 내가 남겠다고 했을 뿐인데 남아서 텅 빈 사무실의 텅 빈 의자에 한 번씩 앉아가면서 그들과 수건돌리기를 하며 놀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혼자 데이트를 즐겼다 수군거리고
—「그림자들의 야유회」 부분

시인의 말에 따르면 한번은 그가 회사 야유회에 가질 않았다. 이유는 야유회가 자신에게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한 명은 당번으로 남아야 하”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남은 뒤 심심했는지 혼자 놀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인의 그 현실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되질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식으로 시인을 재단하여 “혼자 데이트를 즐겼다”고 ‘수군거’린다.
타인들의 인식은 종종 그렇게 나를 빗나간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뒤풀이에서 “커피가 다 식어 리필을 부탁했을” 때 종업원이 딸기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잘못 가져온 것이었고 그렇게 빚어진 실수 앞에서 “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지만 딸기는 잘 먹는 편이라 맛을 조금 보았더니 생각보다 맛이 있어 계속 먹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혼자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는다 눈치를” 준다. 바로 그것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방법이다.
우리는 함께 야유회를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상의 실체를 지워버리고 우리의 인식으로 재단한 대상과 야유회를 하는, 말하자면 「그림자들의 야유회」를 즐기고 있다. 그릇은 그곳에서 내 삶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릇에 맞게 내 삶을 자르고 재단한다.
그런 측면에서 삶은 거대한 어항과도 같다. 투명하게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투명성이 어항의 가장 큰 특징같지만 사실은 삶이 그 틀을 벗어나질 못한다는 구속성이야말로 어항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틀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삶을 그곳에 가두어 놓고 있다. 가둘 뿐만 아니라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기까지 한다.
결국 ‘나’는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존재하며, “텅 빈 의자”를 번갈아 앉아가며 자위행위를 즐긴 후 “석유 냄새나는 기념수건”으로 자살을 택한다. 시인은 타인의 왜곡된 시선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결국 시는 현대 사회에서의 군중 속 고독에 대한 경종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